국내의 음악 보급에 앞장섰던 한국 음악지 35년사를 정리해 본다.

 국내의 음악 보급에 앞장섰던 한국 음악지 35년사를 정리해 본다.



컴퓨터만 켜면 죽기 전에 다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음악정보들과, 시간이 없어서 모두 듣지 못할 음악들을 만날 수 있는 현재를 살고있지만, 정보가 없어서 알지 못하고, 라디오가 없어서 음악을 듣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핫뮤직이 창간한지 14년이 되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에게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했던 지난 음악지들을 정리해 본다.


글 송명하 수석기자


1960년대 :
- 최초의 팝 음악잡지 출현
국내에 등장한 최초의 팝 음악 잡지는 ‘팝스 코리아나’였다. 조용호, 이해성, 서병후가 함께 만든 출판사에서 발간한 잡지로 1967년에 창간되었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영미권의 팝음악을 소개했던 잡지이고, 잡지를 통한 토론의 장이 펼쳐지는 등 국내 팝 음악의 저변 확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잡지이다. 이후 ‘가요생활(뮤직 라이프)’라는 잡지가 창간되었고, 가요생활의 편집장 이문세(가수 이문세와는 동명이인)였다. 가요생활이 국내의 음악계에 기여한 바도 크지만, 일본식의 번역어투가 많았다는 지적도 있다. 가요생활 이외에 악보와 국내의 음악인들에 대한 가십들을 본격적으로 다룬 잡지는 ‘대중가요’였다. 우리 가요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자료가 전무한 지금 ‘대중가요’는 당시의 국내 음악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팝 음악이든 가요이건 간에 한가지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잡지들은 시대적인 상황 때문인지 그 생명력이 길지 않았다. 전축은커녕 라디오의 보급도 변변치 않을 무렵.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외국의 팝 음악이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곡 이외에 ‘클럽’이나 ‘음악싸롱’에서나 흘러나왔을 법한 노래의 소개는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생명력이 짧았던 몇몇 잡지들에서 다루던 팝송 이야기나, 가수들의 가십 이야기는 1960년대 말에 연이어 창간했던 ‘선데이 서울’, ‘주간 한국’, ‘주간 경향’, 그리고 ‘일간 스포츠’등의 버라이어티한 책자나 신문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1970년대 :
- 본격 팝 매거진 ‘월간팝송’의 탄생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팝 매니아들이 많은 것을 보면 ‘월간팝송’은 정말 대단한 잡지이다. 초창기 비록 번역 위주의 기사들이 많았지만, 팝 음악의 전도사로서 ‘월간팝송’의 업적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다. 월간팝송은 1971년 11월에 창간되었다. 앞서 소개했던 ‘가요생활’의 이문세가 창간한 잡지로 초대 편집장은 나영욱이었다. 이후 편집장으로 부임했던 선성원, 전영혁, 등의 편집장들은 이후에도 국내의 팝 음악씬에서 맹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초기 ‘월간팝송’은 기사의 양에 비해서 악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았지만, 점차로 악보는 줄어들고 기사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예전 ‘월간팝송’을 보면 웃지 못한 해프닝들이 하나씩 보이곤 하는데, 그중 하나는 당시 단발령 시대에 머리 긴 외국의 아티스트 사진을 그대로 싣지 못하고, 책 자체에서 나름대로 검열을 가했던 사진들이다. 머리 긴 락커들의 사진은 원래의 모습에서 긴 머리 부분만 색깔로 지워버려 모두다 단발의 헤어스타일의 아티스트가 된 것. 지금 보면 웃을 수밖에 없는 사진이지만, 서슬 퍼렇던 유신의 잔재를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월간팝송’은 1987년 2월에 폐간했다. 창간 15주년 기념호가 나온 지 3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2월호의 마지막 페이지인 편집후기에는 온통 침울한 분위기의 글들이 메워졌고, 이후 ‘월간가요’로 거듭났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 무적 ‘월간팝송’의 라이벌은 무가의 음악정보 책자
1970년대 ‘월간팝송’의 아성에는 감히 상대할 다른 팝 전문지가 없었다. 빌보드 차트에서부터 팝 야사까지를 두루 섭렵한 ‘월간팝송’은 말 그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로 올라섰다. 그 아성에 도전한 것은 그를 압도할만한 규모의 화려한 책자가 아니라, 방송국에서 발간하던 무가의 정보지였다.
1970년대의 국내 팝계는 이른바 ‘DJ의 시대’였다. 최동욱과 피세영의 이후에 등장한 이종환, 박원웅 등 팝음악의 전령들에 의해서 해외의 팝 정보와 함께 신곡들이 라디오를 통해 소개되었다. 1960년대와 같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 깊숙한 곳으로 팝음악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서 방송국에 엽서를 띄우고 신청곡이 나오기를 손꼽아서 기다리는 일. 노래를 꼭 듣기 위해서라도 엽서를 예쁘게 장식하거나 시처럼 미려한 문구의 사연을 생각해 내는 일도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또하나의 일과가 되었다. 이종환이 초대 DJ로 있던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이러한 애청자의 사연들을 모아서 한 권의 책을 발행했다. 당시로는 초 호화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드커버로 등장한 방송의 타이틀과 동명의 책은 무가지는 아니었지만, 197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의 인기곡들과 당시 방송의 인기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는 앞서 DJ의 전통들이 김기덕과 김광한에게로 그대로 전수된 시기였다. 특히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던 두 DJ는 보다 적극적인 방송 홍보 전략으로 매주 발행되는 무가의 음악정보 책자를 만들었다.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에서 발행한 책자는 ‘Pop PM 2:00’였고,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에서 발행한 책자는 ‘POKO’였다. ‘Pop PM 2:00’는 두시에 방송하는 프로그램의 시간에서 착안된 이름이고, ‘POKO’는 ‘Pops Korea’의 준말이다. 각각의 책자에는 그 주에 있었던 팝계의 단신들과 프로그램의 신청곡 순위, 악보, DJ의 칼럼에서 오디오에 대한 정보까지 한마디로 ‘월간팝송’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을 담고있었다. 무가지였던 관계로 배포가 다 되기 이전에 책을 챙기기 위해서 발행되는 날짜를 맞춰서 배부처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예전부터 그 이름을 날리던 박원웅과 이종환의 프로그램에서도 무가의 정보지가 발행되었다. 박원웅의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책자의 이름은 ‘팝스 팝스’에서 ‘FM 텐’으로 한차례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1980년대 :
- ‘음악세계’의 등장과 ‘월간 팝송’의 폐간
1970년대 말부터 시작한 방송 프로그램들의 무가지 제작은 지방의 네트워트들로 이어졌다. 몇 안되는 각 지역 방송국의 로컬 프로그램들에서도 비슷한 류의 정보지들을 발간했고, 팝 매니아들은 무료로 정보들을 받아볼 수 있는 풍요로움을 영위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월간팝송의 아성에 도전한 것은 ‘음악세계’였다. 1984년 8월에 창간된 ‘음악세계’는 1960년대 최초의 팝 매거진 ‘팝스 코리아나’를 탄생시켰던 서병후가 발행인이었다. 중앙일보에서 발간한 ‘음악세계’의 특징은 우선 팝 음악의 경우, 영문 그대로의 제목을 표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해석한 제목을 표기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영어 표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오히려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월간 팝송’ 매니아와 ‘음악세계’ 매니아가 양분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음악세계’가 ‘월간팝송’과 차별화된 부분은 과감한 컬러페이지의 도입, 책의 반정도의 기사를 가요에 할애한 점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후발주자였던 ‘음악세계’가 ‘월간 팝송’을 가장 크게 위협했던 것은 ‘빌보드’와의 특약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런 계약 없이 빌보드 차트를 무단으로 전재했던 ‘월간 팝송’은 ‘음악세계’가 독점계약을 하는 바람에 그 이전에 사용한 비용까지가 고스란히 청구되었다는 씁쓸한 뒷 이야기를 남기고, 이후의 책에서는 지명도가 한 단계 낮은 ‘캐쉬박스’의 차트를 연재하기도 했다.
‘월간 팝송’과 ‘음악세계’는 그 외에도 보이지 않는 경쟁들이 있었다. 예전 교과서 사이즈로 발행되었던 ‘월간 팝송’의 사이즈가 공책 크기로 커진 점이나 가요기사의 비중이 높아진 점등도 바로 이 두 잡지의 경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잡지상의 경쟁 이외에도 ‘음악세계’는 당시 국내 초유의 규모였던 ‘제1회 한국 록 그룹 페스티벌’을, 월간팝송은 한국의 우드스탁이라는 모토 아래 ‘용평 팝 페스티벌’을 통해서 흩어진 팝 매니아들의 규합을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음악세계’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본력에 밀린 ‘월간팝송’은 다시 지금의 잡지 사이즈인 국배판으로 그 판형을 바꾼 뒤 오래되지 않아 폐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음악세계’ 역시도 경쟁자이자 파트너를 잃어버린 후 ‘뮤직 씨티’로 개명하며 잡지의 성격을 선회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폐간하게 된다.
잠깐이지만, ‘월간 팝송’ 편집장 출신인 전영혁은 ‘월간 팝송’의 책속의 책을 진 일보시킨 ‘영월드’라는 책을 발간했다. 아티스트에 대한 심층 분석과 많은 화보를 담고있던 이 책 역시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 동호회지의 도약
‘음악세계’와 ‘월간 팝송’의 경쟁은 결국 승자도, 그렇다고 패자도 없는 결말을 맞게되었지만, 두 음악지들은 수많은 팝 동호회들을 출범시켰다.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동호회 가운데 하나는 ‘코리아 헤비메틀 클럽(K.H.M.C)이었다. 장현희와 여상관을 주축으로 한 이 모임에서는 국내의 다른 음악 매거진에는 관심도 없는 듯, 해외의 많은 음악지들을 번역한 기사와 국내의 메틀 뮤지션들을 독자적으로 취재한 기사들을 담은 ‘Metal News’라는 소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헤비메틀 이외에 아트락 위주의 음악을 다루던 동호회인 ‘하모니 음악 연구회’는 하세민이 주도하던 동호회였다. 손으로 또박 또박 내려쓴 기사들이 촘촘한 회지 ‘하모니’는 1980년대 말까지 15권의 동호회지가 만들어졌고, 그 15권의 책을 모은 합본이 1990년에 발간되었다. 이 외에도 조성진, 최유길, 이원등 다수의 음악 평론가 집단을 배출한 ‘음악 아카데미 연구회’의 책자 ‘매니아’, 레드 제플린의 팬클럽인 ‘스완송’에서 발간했던 ‘The Song Remains The Same’와 같은 책자도 동호회의 소책자 가운데에서는 양질의 정보지로 기억되고 있다.
동호회지는 아니지만, 국내 최초의 프로그레시브 락 전문 방송인 ‘음악이 흐르는 밤’의 DJ였던 그때까지 프로그레시브락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에 방송을 통한 새로운 음악 보급과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파피루스’라는 무가지를 발행했다. 이쪽 방면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던 시절에 발간된 이 책자는 방송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던 지방에까지 입소문으로 전파되어서, 복사판의 책들도 가격이 메겨져 거래되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 파피루스’는 기간을 정해놓고 나오는 잡지의 형태가 아니어서, 성시완이 다시 ‘디스크쇼’를 맡았던 당시에 잠시 부활했었고, 1989년에는 유가지의 형태로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본격적인 잡지의 틀을 갖추고 ‘Art Rock’이 창간되었다. 초기에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초 희귀 자료들을 선보였지만, 8호를 넘어서면서 그 신선미가 떨어지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1986년에 FM 프로그램 ‘25시의 데이트’를 맡은 전영혁도, 예전의 포코와 같이 예쁜 엽서들과 그동안의 방송 순위들을 기록한 소책자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1991년 처음으로 무가지로 배부했다.


- 뮤직랜드의 출현
동호회지는 존재했지만, 제대로 된 음악지가 없었던 무렵 ‘뮤직랜드’가 탄생했다. ‘뮤직랜드’는 1989년 10월 창간된 잡지로, 당시 많은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실세’들을 과감히 등용하면서 전문화의 틀을 갖추고, ‘Magazine For Musicianship Training’이라는 취지에 걸맞게 악기에 대한 정보나, 미디강좌와 같은 새로운 시도들을 단행했다. 비록 외지에 실린 기사들의 전재기사가 많긴 했지만, 그때까지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색다른 기사들이 흥미를 모았고, 국내의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내부의 문제로 ‘뮤직랜드’두개의 잡지로 쪼개지는 위기를 맞게된다. 기존의 편집진들이 모두 이탈을 하게 되었고, 남은 뮤직랜드는 새로운 편집진들과 말 그대로의 ‘Magazine For Musicianship Training’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고, 이탈한 편집진들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음악 전문지 ‘핫뮤직’을 창간하게 된다.


1990년대 :
- ‘핫뮤직’, ‘뮤직 피플’의 창간
앞서 살펴본 대로 ‘뮤직랜드’에서 이탈한 편집진(편집장 성우진)이 창간한 ‘핫뮤직’이 처음 나온 것은 1991년 11월호이다. 해외에서는 락이 다시 중흥기를 맞고 있었지만, 국내에는 변변한 음악지 하나도 없던 시절 ‘핫뮤직’의 존재는 대단한 것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 락 뮤지션의 소개와 병행해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락의 흐름과 명반등을 일목요연하게 짚어주는 ‘핫뮤직’은 말 그대로 ‘락음악의 교과서’나 다름이 없었다. 뮤직피플은 예전 ‘하모니 음악 연구회’를 이끌던 하세민이 만든 잡지였다. 당시까지 보기 힘들었던 중철 제본으로 등장한 잡지였고, 초기에는 많은 기사들이 있었지만 이후 화보중심의 잡지로 바뀌면서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음반의 소식을 전하는 ‘주간 음악 정보’, ‘컬렉터’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그 생명만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


- 통신 동호회지의 출현과 또 다른 무가지의 탄생
1990년대는 PC통신 동호회들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시기였다. 하이텔과 천리안을 비롯해서 후발주자인 나우누리까지 텔넷을 기반으로 한 PC통신은 자연스레 동호회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 동호회 가운데에서는 음악동호회의 힘이 특히 막강했다. 일찌감치부터 각 장르의 음악 동호회를 분화시켰던 하이텔에는 ‘소리모꼬지’나 ‘아일랜드’와 같은 동호회가 있었고, 천리안에는 ‘두레마을’이라는 대표적인 동호회가 있었다. 두 서비스 업체보다 뒤늦게 생긴 관계로 많은 회원들을 선점하지 못했던 나우누리는 상대적으로 큰 입김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프로그레시브락을 전문으로 다루는 ‘HOPE’와 같은 동호회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음악감상회를 갖거나,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모아서 회지를 만드는 기본적인 활동을 했는데, 사이버상 아마추어 평론가들의 글이 인쇄된 활자로 되는 중요한 작업들이었다. 천리안 ‘두레마을’의 회지는 모임의 이름과 같은 제목으로 회원들을 위주로 판매되었고, 하이텔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동호회 ‘아일랜드’는 역시 자신들의 모임과 같은 이름의 책자를 발간해서 전국의 전문 레코드샵을 통해 판매하기도 했다. PC통신 동호회의 특성상 제대로된 편집이 아니고,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한 간단한 작업을 통해 만든 잡지이긴 하지만, 그 의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자신감에 넘친 책들이었다.
베스타나, 세고비아와 같은 브랜드에 비해 출발이 늦기는 했지만, 어느 회사보다도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던 ‘콜텍’은 1996년 ‘Guitar Net’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국내 기타 평론의 일인자인 조성진이 모든 글을 담당했던 이 작은 소책자는 기타리스트들에 대한 이야기와 인터뷰, 그들의 어록을 비롯 기타의 제작과정이나 가격까지 오직 기타를 위한 소책자로 기타리스트 지망생이나, 전문 음악인들이 주로 구독하던 일종의 전문지라고 할 수 있다. 무가지였지만 충실한 기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책이다.
기타에는 ‘Guitar Net’이 있었다면, 키보드에는 ‘Korgy’가 있었다. 미디 앤 사운드에서 만든 무가지로 1998년 창간 이래 국내의 유명 뮤지션들이 직접 표지 모델이 되고 있다. 지금은 ‘Sound On Air’라는 제호로 바뀌고, 악기 이외에도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기사를 다루며 악기상을 중심으로 무로 배부된다.


- ‘GMV’의 출현과 음악지의 춘추전국시대
KBS-TV에서 방영하던 ‘지구촌 영상음악’은 그때까지 많이 접할 수 없었던, 뮤지션들의 비디오 클립이나 실황공연 장면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팝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지구촌 영상음악’에서 만든 잡지가 바로 ‘GMV’이다. ‘GMV’는 1993년 10월에 창간되었다. 마이클 잭슨을 포지인물로 내세운 창간호가 의미하듯이 본격적인 팝 음악 전문지가 탄생한 것이었다. 방송의 특성을 십분 살려서 초기 ‘GMV’에는 팝스타들의 뮤직 비디오 클립이 부록으로 제공되었다. 역시 방송을 통해 만들어진 동호회와 각 지역의 통신원들이 책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페이지가 많았고, 그때까지 없었던 ‘팝’에 대해 ‘특화’함으로 해서 많은 매니아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현존하는 음악지 중에서 ‘핫뮤직’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잡지이다.
‘월드 팝스’는 1996년 6월에 창간되었다. ‘핫뮤직’의 초대 편집장이었던 성우진이 편집장을 맡았던 책으로, 팝과 락을 골고루 다뤘던 잡지이다. 하지만, 잡지의 성격이나 방향성이 뚜렷하지 못했다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부록으로 카세트 테이프나 브로마이드 등의 당근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존 음악지들의 아성을 누르지 못하고, 오래가지 않아 폐간되었다.
1997년 3월 창간된 ‘락킷’는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락을 표방한 락 전문지이다. 앞서 ‘월드 팝스’의 편집장 성우진과, 1980년대 ‘코리아 헤비메틀 클럽’의 장현희가 편집장을 담당했었다. 때 마침 활발히 이루어지던 국내의 락 공연에 대한 기사 비중이 높았고, 무가지로 발행하던 ‘Guitar Net’을 흡수하면서 본격적인 락 전문지의 모습을 갖춰갔지만, 소리 소문없이 폐간되어 버린 책.
역시 락 전문지를 표방한 ‘로커스’는 1997년 10월에 창간되었다. 박은석을 편집장으로 한 ‘록커스’도 마찬가지로 락을 다루기는 했지만, 잡지만의 뚜렷한 색깔이 없어서 롱런을 하지 못했던 경우이다. 기존의 음악판에 대해서 관심은 있었지만,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드는 잡지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가 사라진 그만그만한 음악지들 가운데 가장 큰 족적을 남겼던 음악지는 ‘서브’이다. ‘핫뮤직’ 출신인 성문영이 편집장을 맡았고, 국내에서는 당시까지 홀대받던 장르였던 브릿팝에 대한 애정으로 수많은 지지층을 얻어냈던 음악지. 1998년 1월에 창간했고, 브릿팝과 더불어 국내에 조금씩 불기 시작한 홍대를 중심으로 한 국내의 인디씬에 대해서 가장 체계적으로 다루었던 잡지였다. 부록으로 끼워주던 CD에 국내의 인디 뮤지션들의 데모 음원들을 수록하며, 많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았던 의도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다만 편집장이 박준흠으로 바뀌면서 국내 뮤지션의 비중이 수준 이상으로 높아지면서 오히려 외면을 받았던 잡지로 그 후 오래지 않아 역시 폐간의 운명을 맞았다.
아직도 국내뮤지션들만을 다루는 전문지는 어려운 현실인 듯 보인다. 본격적으로 국내의 뮤지션 이야기를 다뤘던 ‘데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CD부록에도 불구하고 1995년 창간호를 포함한 3권을 책을 내고 폐간했고,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알 수가 없는 ‘씨(See)’역시도 1990년대 말 반짝했다 사라졌다. 쌈지에서 1998년에 창간한 ‘Da’는 초창기 국내의 음악만을 인터뷰 형식으로 다루는 음악지였지만, 이후 ‘Beat’라는 얼터너티브 전문지로 선회한 이후 그 수명을 다했고, 국내의 인디씬만을 다루던 무가지 ‘인디즈(Indiz)’역시도 소리 소문 없이 생겼다가 없어진 경우이다.
락 음악지 보다도 국내에서 더 홀대 받았던 경우는 아마 재즈 전문이일 것이다. 1995년 6월에 창간한 ‘재즈 트랙트’는 소규모 모임에서의 출발이 잡지로 이어진 경우였지만, 창간호가 폐간호로 전락한 케이스였고, 1990년대 말에 등장한 ‘두밥(Doo-Bop)의 경우도 그 존재만을 알리고 사라져버린 재즈 전문지였다.
잡지라기 보다는 ‘무크지’의 성격이 강한 ‘뮤지컬 박스’는 제네시스의 동명 노래제목 답게 아트락과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지였지만, 1999년 10월 창간호를 포함해서 두권만을 발행하고 아직 뒷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2000년대 :
- ‘오이뮤직’의 등장과 일본음악 개방에 따른 기대
2000년에 들어서면서 또 하나의 영향력있는 팝 전문지가 탄생했다. ‘GMV’의 원용민이 편집장을 맡은 ‘오이뮤직’이 그것이다. 기본적으로는 팝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락에 대해서는 ‘Q’와의 특약을 통한 기사의 다양화를 꾀했다. 인터넷 쇼핑몰과의 연계 등 언제나 발빠르게 움직이는 음악지로, 얼마 전에는 ‘오이 스트리트’로 변모하며 전면적인 수술을 단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 가장 커다란 화두는 일본 문화의 수입이었다. 일본 음악에 대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잡지들도 하나씩 둘씩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락킹 재팬(Rockin' Japan)’은 그 대표적인 잡지라고 할 수 있다. ‘라르캉시엘’, ‘시암 섀이드’, ‘라퓨타’ 등 J-팝의 슈퍼스타들을 총 출동시킨 기사들로 국내의 일본 음악 시장에 있어서 선구자가 되려했던 의도가 엿보이는 잡지였지만, 생명력은 길지 못했다.
기타 기존의 여러 음악지들에서도 앞 다투어 J-팝의 기사들을 유치하려 애를 썼지만, 판매부수와는 크게 상관관계가 없었다.


- 또 다른 무가지들의 등장
‘질러’는 2000년에 등장한 무가지이다. 노래방기계를 생산하는 ‘태진 미디어’가 자사의 광고를 위해 만든 음악지였지만, 휴대하기 쉬운 깜찍한 사이즈와 대중속에 파고든 재미있는 음악 이야기들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폐간된 상태.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동호회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라운드’는 초기 무가지의 형태로 배부되며 매니아층을 형성하기도 했던 잡지이다. 2003년 2월에 창간되어, 2004년에 접어들며 유가지로 그 성격이 바뀐 형태. 유가지로 바뀌면서 DVD 샘플러나, CD 샘플러등의 부록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지금은 휴간한 상태이다. 라운드는 지금 잡지사업을 포기하고 음반과, 이벤트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바운스 역시 무가지로 힙합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였다. 힙합에 대한 전문적인 글들과 국내 힙합 뮤지션들에 대한 애정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역시 지금은 폐간되었다.


2004년 그 이후 :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잡지의 시대는 이제 지났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설득력을 가져가고 있는게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국내 음악지의 역사는 그다지 유쾌하지많은 않다. 외국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음악지들이 서로 자신의 영역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반면, 국내에는 너무나 쉽게 창간과 폐간이라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젠가 ‘핫뮤직’에도 실린 내용이지만,
“창간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쉽사리 폐간할 것이라면 하지 말아라.”
라는 이야기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이다. 잡지 하나가 망하고 흥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남겨진 자의 몫이 되곤 하는 것이 또한 사실 아닌가.
초창기 올바른 정보의 보급이라는 명제는 이제 잡지의 사명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지금 음악지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느 곳인가. 필자들의 뚜렷한 논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올바른 문화를 선도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핫뮤직’이 어느덧 창간 14주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정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핫뮤직’은 건재하다. 다음 번 핫뮤직 20주년, 30주년 기념 특집기사 역시도 내가 쓰고 싶다.



월간 핫뮤직 200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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