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 1980년대 초 ‘헤비메탈 이전의 하드록 씬’ : 무당 최우섭 인터뷰




[대중음악SOUND 4호/2012년] 그 때 그 음악씬

1970년대 ~ 1980년대 초 ‘헤비메탈 이전의 하드록 씬’

권석정 | 유니온프레스 기자

※ 참조 : "무당 - 한국 최초의 헤비메틀밴드. 무지개, 무당, 그대 생각, 그 길을 따라, 멈추지 말아요"


한국의 하드록을 살펴보다

한국의 록은 영미 록의 변천사에 근간을 두고 발전해왔다. 60년대에 등장한 신중현의 애드 훠, 김홍탁의 키보이스, 이진의 바보스 등은 약 5년 정도 활동 시기가 앞섰던 엘비스 프레슬리와 벤처스, 그리고 동시대 활동했던 비틀즈 스타일의 로큰롤을 흡수했고 이후 지미 헨드릭스 류의 사이키델릭 록으로 사운드의 폭을 넓혀갔다. 이러한 움직임을 시작으로 미8군과 고고클럽을 중심으로 그룹사운드 전성시대가 펼쳐졌고 70년대로 들어서면서 라스트찬스, 데블스, 김 트리오, 트리퍼스, 검은 나비 등 다양한 밴드들이 활약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의 도래는 1975년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인해 철퇴를 맞게 된다. 이 암흑기는 박정희 정부가 막을 내리는 1979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80년대가 시작되면서 기존 한국 그룹사운드와 차별화된 록 밴드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6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의 음악을 레퍼런스로 삼은 새로운 세력들이었다. 라스트찬스의 전신 격인 ‘와일드 파이브’ 출신의 최우섭이 미국에서 결성한 무당이 한국에 돌아왔고 대학가요제 출신인 작은거인과 마그마 등은 여타 스쿨밴드들과 달리 프로페셔널하면서도 강한 록을 들려줬다(김광민이 재적한 동서남북도 그 중 하나였다). 이들은 1980년대 초반 일제히 앨범을 발표하고 국내 가요계에 일정부분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의 음악은 기존 국내 그룹사운드의 로큰롤, 사이키델릭 록에서 진일보한 ‘한국 하드록의 시작’이라 할 만한 결과물이었고 카피 위주가 아닌 창작곡 중심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했다. 또한 악곡, 연주 면에 있어서 60~70년대 그룹사운드와 80년대 중반부터 앨범을 내기 시작한 시나위, 부활, 백두산, 카리스마, 뮤즈에로스, 블랙홀, 블랙신드롬 등 헤비메탈 밴드의 중간다리이기도 했다.

    

무당의 등장, 하드록의 시작

한국의 하드록을 짚어볼 때 제일 처음 살펴봐야 할 밴드는 바로 무당이다. 무당은 흔히 한국에서 미국 스타일의 정통 하드록을 처음 시도하고 나아가 헤비메탈까지 접근한 밴드로 거론된다. 무당은 최우섭이 70년대 중반 미국에서 결성한 밴드다. 최우섭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60년대 후반부터 미8군과 이태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최우섭은 이태원의 세븐클럽, UN클럽, 007클럽을 비롯해 명동과 종로의 오비스캐빈, 실버타운, 미도파살롱, 마일드클럽 등에서 활동했으며 미8군 내 사병 클럽, 장교클럽에서는 신중현, 락 앤 키, 윤복희, 이금희, 서수남·하청일이 재적했던 컨트리 밴드 ‘그랜드 올 오프리’, 박인수 등의 선배들과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원래 베이스를 연주했던 최우섭은 김태일(기타), 나원탁(기타)과 함께 와일드 파이브로 활동하다가 미8군의 쇼 밴드로 스카우트되면서 밴드를 탈퇴했다.

이후 1967년에 김태일과 나원탁은 새 베이시스트로 곽효성을 영입하고 당대의 록 보컬리스트였던 김태화와 함께 라스트찬스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후 최우섭은 이중산(기타), 한춘근(드럼) 등 당시 최고의 테크니션들과 활동했고 더 후,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 게스 후의 레퍼토리를 주로 연주했다. 최우섭과 본래 친구 사이였던 김태화는 김석규(기타), 노승준(건반), 곽효성 등과 밴드를 결성해 딥 퍼플의 <Child In Time>과 같은 레퍼토리를 소화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선배 그룹사운드들과 다른 ‘하드록 세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 또한 김태화는 당대의 보컬리스트라는 명함에 걸맞게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손꼽혔던 김양일을 비롯해 미국 버클리로 유학 가기 전에 이미 촉망 받는 신예들이었던 김광민(건반), 한상원(기타)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최우섭은 1974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그는 작곡을 하기 위해 기타로 전향하고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멤버들이 설립한 ‘블루왈츠’라는 재즈스쿨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현지의 록을 습득한 최우섭은 이듬해 미국에서 만난 차종면(드럼), 정진(기타), 김성관(베이스), 장화영(건반)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고 뒤따라 미국에 온 김태화가 보컬로 합류했다. 이들은 흥미롭게도 ‘라스트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나중에 ‘무당’으로 개명했다. 무당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점으로 시애틀, 로스앤젤레스를 돌면서 대학가, 라이브클럽에서 공연했다. 관객은 교민과 현지인이 반반이었다고 한다. 이후 김태화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 <바보처럼 살았군요>로 출전하기 위해 귀국했고 인기를 얻게 되면서 솔로로 활동하게 된다.

최우섭은 레이프 가렛의 내한공연 프로모터의 자격으로 1980년 한국에 돌아왔다. 최우섭은 당시 최고 인기 밴드였던 사랑과 평화를 오프닝으로 세우려 했지만 레이프 가렛 측에서 강한 록밴드를 원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무당이 오프닝 공연을 맡게 됐다. 최우섭은 미국에 있던 정진과 차종면을 급하게 불러다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숭의음악당에서 열린 레이프 가렛의 콘서트는 8일 12회 공연이 보름 전에 모두 매진될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모았다. 몰려든 관객들 때문에 숭의음악당 철문이 부서질 정도였다고 한다. 함께 무대에 올라 강한 하드록을 선보인 무당은 화제의 밴드로 떠올랐다. 그렇게 최초의 해외파 밴드였던 무당을 통해 국내에 정통 하드록이 얼굴을 드밀게 된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자 레이프 가렛과 무당은 방송국 특집 녹화를 하기도 했다. 당시 최우섭은 국내에 없던 마샬앰프 JCM800과 이펙터들을 미국에서 직접 공수해와 연주했고, 처음 듣는 파열음에 깜짝 놀란 방송국 PD들은 번번이 연주를 중단시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무당은 국내 최대 음반사였던 오아시스레코드로부터 앨범 두 장을 내는 조건에 1,000만원의 계약금을 받을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주춤했던 밴드 음악의 부활을 내다본 오아시스레코드의 혜안이었을까? (사실 애초에 오아시스레코드는 사이드 A 레이프 가렛, 사이드 B 무당의 스플릿 앨범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당의 앨범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최우섭은 미국에서 만들었던 영어 가사를 한글로 바꿨지만 거의 대부분 음반심의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국내는 ‘광주사태’ 이후 계엄령이 걷히지 않은 상황으로 더욱 규제가 심해진 이른바 ‘계엄 심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최우섭은 이태원에서 함께 활동했던 (당시 김양일과 함께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던) 이중산에게 아예 모든 기타 연주와 편곡을 맡겼지만 연주자들의 면면에 비해 결과물은 평범했다. 파격적이었던 라이브에 비한다면 무당의 1집 [무당]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고 최우섭의 표현에 따르자면 ‘치욕’이었다. 최우섭은 60~70년대보다 더 나빠진 국내 음악 환경에 실망했고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중산은 국내 언더그라운드 씬에 쭉 머물렀고 미국으로 갔던 장화영은 나중에 H2O의 멤버로 돌아오게 된다.

    

김수철, 하드로커에서 독보적인 작곡가로

최우섭은 한국으로 돌아와 예기치 못하게 무당으로 활동하게 됐을 무렵 베이스에 조하문, 세컨드 기타로 김수철을 유념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두 뮤지션이 자신과 같은 음악을 한다는 동료 의식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던 송골매, 이수만과 365일과는 원래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최우섭이 보기에 그들의 음악은 록보다 가요에 가까웠고,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당의 1집을 제외하면 작은거인의 2집이 국내 최초의 정통 하드록 앨범이라 할 수 있다. 김수철은 10대 때 미8군에 진출하고, 대학가요제를 통해 이름을 알린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였다. 당시 밴드 연주자로서 엘리트 코스를 모두 거친 셈이었다. 김수철은 유년기에 지미 헨드릭스, 그랜드 훵크, 제임스 갱, 딥 퍼플을 주로 카피했다고 한다. 이미 프로페셔널한 연주력을 지녔던 김수철은 화려한 테크닉 뿐 아니라 이빨로 기타를 연주하는 등 무대 매너에서도 기존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그는 국내 최초로 라이브에서 와이어리스 기타를 사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수철은 대학에 진학하기 전 ‘파이어폭스’라는 밴드를 결성해 미8군과 동두천, 무교동의 클럽에서 연주를 했다. 대학 진학 후 ‘퀘스천’이란 밴드로 활동하던 김수철은 선배의 권유로 대학 연합팀인 작은거인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1978년 전국 대학축제 경연대회에 출전해 <일곱 색깔 무지개>로 대상을 거머쥐게 되고 이듬해 한국음반을 통해 1집을 발표했다. 1집은 녹음기술 등의 문제로 빛을 보지 못했고 수록곡들은 작은거인 2집과 김수철 솔로 1집에 다시 실리게 된다.

작은 거인 2집은 무당의 1집을 제작했던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나왔다. 1981년에 나온 이 앨범은 국내 최고 수준의 스튜디오에서 일본인 엔지니어에 의해 녹음됐고 그에 걸맞은 양질의 사운드가 구현됐다.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각각의 곡들이 지닌 탁월한 완성도였다. <새야>, <알면서도>, <일곱 색깔 무지개>는 영미 하드록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고 <별리>는 국악가요로서 이정표를 세웠다. <어둠의 세계>에서는 훵크 리듬과 함께 일면 재즈 록의 성향도 내비쳤으며 <행복>, <외로움>을 통해 가요 작곡가로서의 재능까지 보여줬다. 작은거인 2집은 필시 기존의 그룹사운드, 무당의 1집에서 진일보한 기념비적인 결과물이었지만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김수철은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작은거인 2집 이후 음악활동을 아예 접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못 다 핀 꽃 한 송이>가 수록된 솔로 1집이 엄청난 빅히트를 거두면서 김수철은 하드로커가 아닌 가수로서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물론 김수철은 이후의 앨범들에서도 꾸준히 다양한 록을 선보였다. 하지만 방송국 시스템 때문에 밴드와의 라이브보다는 MR로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중들에게는 자연스레 일반적인 솔로 가수와 다름없이 인식됐다. 이후 김수철은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 한영애의 <바라본다> 등을 만들며 작곡가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이러한 모습은 신중현과 비교되기도 했다.

    

마그마, 더욱 견고한 하드록

마그마의 1집은 작은거인 2집에 이어 제대로 된 하드록을 선보였다. 조하문(보컬, 베이스), 김광현(기타), 문영식(드럼) 3인조로 구성된 마그마는 박두진의 시를 개사해 노래한 <해야>로 1980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았다. 당시 마그마는 여타 스쿨밴드와 단연 차별화된 헤비한 록 사운드 들려줬다. 특히 조하문의 날카로운 음색과 김광현의 거친 기타가 그랬다. 어린 시절 딥 퍼플의 음악을 들으며 하드록의 매력에 빠졌다는 조하문은 중3때 친구들과 밴드 ‘갤럭시’를 결성해 고등학교 때는 신촌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조하문은 대학에 진학한 후 스쿨밴드 ‘아스펜스’를 조직했고 연세대에서 주최한 대학보컬그룹 경연대회에 출전해 딥 퍼플의 <Burn>으로 대상을 타게 된다. 이후 아스펜스를 해체한 조하문은 연고대 연합밴드 ‘라이너스’ 출신의 김광현과 의기투합해 마그마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김광현은 둘은 서로의 노래와 기타연주에 반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이들은 전용 연습실을 마련하고 깁슨, 펜더 등 당시로서 구하기 힘든 악기들로 무장해 합주를 했다.

조하문은 딥 퍼플을 비롯해 퀸,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MBC 대학가요제 입상 후 녹음한 마그마의 1집은 작은거인 2집과 마찬가지로 정통 하드록 사운드가 담겨 있었다. 작은거인과 다른 점이라면 ‘나이프 조’라 일컬어진 조하문의 날카로운 샤우팅 창법이었다. 조하문이 <아름다운 곳>, <해야>에서 들려주는 하이 톤의 샤우팅 창법은 기존 한국 록에서 찾아볼 수 없던 것이었다. 김광현의 기타는 김수철에 비해 테크니컬하지는 않지만 폭발하는 에너지가 충만했다. 특히 연주곡 <탈출>에서의 대담한 전개, 후반부에서의 슬라이드기타 연주는 인상적이다. 김수철이 작곡에서 한국적인 면모를 보인 것과 달리 마그마는 철저히 영미 록에 근거한 악곡을 선보였다. 가령 <알 수 없어>에서는 8비트로 스트레이트하게 달리다가 후반부에 슬로우 블루스로 자연스럽게 전환하는데 이는 레드 제플린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또한 <그날>과 같은 강렬한 3인조 사운드는 ‘크림’을 연상케 한다. 이들은 대학가에서 스타로 떠올랐고 방송에도 출연했지만 인텔리들이었던 멤버들은 전업 뮤지션을 할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마그마는 1집만을 남긴 채 해체했다. 한동안 음악계를 떠났던 조하문은 1987년 솔로가수로 앨범을 내고 나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후 그는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마그마와 작은거인은 대학 스쿨밴드를 통해서도 미8군 못지않은 실력파 밴드가 나올 수 있다는 증명한 사례였다. 하지만 동시에 하드록이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이는 60~70년대에 로큰롤과 사이키델릭 록 등 당시로서 강력한 음악을 했던 그룹사운드들이 고정적인 팬 층을 형성하면서 안정적으로 활동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이는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인한 밴드음악의 공백이 다양한 뮤지션뿐만 아니라 그 수요마저 앗아가 버린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 비록 대중적으로 큰 팬덤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작은거인과 마그마는 분명 영미 록을 토대로 창작을 이루는 발전을 이뤘다. 이는 필시 영미 록을 카피하고 재현하는데 중점을 둔 60~70년대 그룹사운드의 움직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무당의 컴백, 헤비메탈의 첫 시도

미국으로 다시 떠났던 최우섭은 2집을 내기 위해 1983년 귀국했다. 다행히 계엄령이 걷힌 상태였고 심의도 한풀 꺾여 1집에서 잘려나간 <멈추지 말아요>와 같은 곡이 2집에 실릴 수 있었다(이 노래는 무당의 유일한 히트곡이 됐다). 2집은 최우섭과 이건태(드럼) 단 둘이 녹음했으며 최우섭 혼자 보컬, 기타, 베이스를 모두 소화했다. 무당의 1집 [무당]과 2집 [멈추지 말아요]는 수록곡이 상당부분 겹친다. 최우섭은 한국에서 다시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계약상의 문제로 앨범을 내야 했고 1.5집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레코딩에 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앨범은 전혀 다른 사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록곡이 겹치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1집이 록이었다면 2집에는 하드록에 헤비메탈의 요소가 첨가돼 있었다. 특히 <그 길을 따라>, <무당>과 같은 곡은 기타 리프와 드럼 연주 면에서 하드록과 헤비메탈 사이에 존재했다.

2집을 발표한 무당은 1집 때와 달리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무당은 방송활동과 함께 야외축제, 소극장 무대, 이태원 클럽 등 다양한 라이브 무대에 올랐다. 최우섭은 베이스에 김일태, 드럼에 한봉을 영입했고 보컬로는 김태화가 다시 합류했다. 이들은 ‘무당과 김태화’란 이름으로 용평 팝 페스티벌, 남이섬 페스티벌에서 UFO(마이클 쉥커의 밴드)의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후 무당은 지해룡을 새 보컬로 영입하고 ‘젊음의 행진’, ‘영일레븐’, ‘쇼2000’과 같은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당시 장발과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무대에 오른 무당은 격렬한 퍼포먼스와 연주로 일반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특히 이들은 MR 위주인 방송국 시스템 때문에 PD, 엔지니어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면도를 요구한 방송관계자들과 다투는 일도 많았다. 또한 무당은 이백천이 개최한 롯데호텔의 록페스티벌에서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 3인조로 활동하던 들국화, 동방의 빛 등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다.

최우섭은 활동의 거점이었던 이태원에 연습실을 차렸는데 그곳에 시나위, 김종서가 재적했던 시절의 부활, 백두산 등 헤비메탈을 추구하는 연주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후배 연주자들과 조우한 최우섭은 무당의 공연에 이들을 오프닝으로 세우기도 했다. 당시 밤무대 업소에서 수많은 러브콜이 있었지만 무당은 철저히 거절했다고 한다. 최우섭은 “밤무대 악사들하고는 상종을 안했고 가수들과 인사도 안 했다. 우리는 우리와 음악적으로 맞지 않으면 아예 안 봤다”고 말할 정도로 음악적인 타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 상황에 한계를 느낀 최우섭은 1985년 한 TV 쇼를 마치고 나와 멤버들을 모아놓고 하루아침에 무당을 정리했다. 공식적인 해체 발표도 없이 최우섭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고, 이듬해에는 시나위, 부활, 백두산이 차례로 데뷔앨범을 내며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인터뷰
일시 : 2011년 11월 26일, 오후 6시
장소 : 일산 카페
대담 : 최우섭 VS 권석정

최우섭은 최근 25년 만에 무당을 재결성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무당의 1, 2집 오리지널 곡들의 편곡 작업에 한창인 최우섭을 만났다. 인터뷰 내용은 크게 무당의 지난 행보와 프로모터로서 활동하던 시기의 이야기로 나뉜다.


권석정 무당은 미국에서 결성했다. 당시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했나?

최우섭 나한테는 솔직히 한국에 좋은 기억은 없어. 젊은 시절에는 장발단속 때문에 경찰서도 많이 가고. 중부경찰서를 많이 들락날락했는데 거기가 완전히 밴드들 모이는 연예협회였다(웃음). 신중현, 김홍탁 형님들 우리 직계선배들 거기서 다 만나는 거야. 즐거웠지 뭐. 종로, 명동의 오비스캐빈, 실버타운, 미도파살롱, 마일드클럽 이런 곳에서 공연할 때다. 나는 한국에 불만이 많았다. 매일같이 경찰서에 끌려오면 아버지가 꺼내러 오고 그랬다. 당시 우리는 미8군에서 A클래스였는데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연예인협회증 받아서 머리를 기를 수 있었다. 어느 날 경찰서장한테 “머리카락은 내 몸이다. 왜 내 몸의 일부를 자르려 하냐”고 대들었다. 그것을 지켜본 아버지가 회사로 오라고 하시더니 “야, 너 여기 있는 것이 고생스럽지 않냐”고 하시더라.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이 나라가 너무 싫다. 동시에 이 나라도 내가 싫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음악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권석정 음악 유학을 목적으로 건너간 것인가?

최우섭 나는 음악 공부하러 간 거야. 우리나라는 그런 음악을 예술로서 가르치는 곳이 없었으니까. 대학에 음악과는 클래식밖에 없었고. 록 음악 하러 외국 나가는 것은 내가 거의 처음이었다. 1974년 23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는데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지. 우리나라는 밴드 하면 ‘퇴폐, 딴따라’ 이럴 때인데 미국에 가니 너무 좋더라. 가서 직접 보니 우리가 한국에서 연주했던 더 후,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의 음악이 그곳에서도 최고였던 거야. 그래서 이태원과 미8군이 좋았다. 해외 앨범을 구할 수 있었고, 거기 관객들은 우리 음악을 알아줬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막상 카피만 했지 내 음악이 없어서 자존심이 상했다. 한국에서는 카피만 잘해도 잘나갔으니까. 장님 문고리 잡은 거였다. 그때까지 나는 베이스를 연주했는데 곡을 쓰려고 기타를 배우게 됐다. 샌프란시스코에 제퍼슨에어플레인의 멤버들이 운영하던 ‘블루왈츠’라는 재즈스쿨에 들어갔다.

권석정 미국에 가기 전에는 라스트찬스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우섭 내가 라스트찬스 초기 멤버이긴 한데 정확히 말하면 라스트찬스란 이름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야. 먼저 김태일(기타), 나원탁(기타)과 함께한 와일드 파이브로 미8군에 들어갔다. 당시 미8군에는 하우스밴드, 쇼 밴드가 따로 있었지. 내가 쇼 밴드로 스카우트되면서 와일드 파이브를 탈퇴하게 됐고 나머지 멤버들이 새 베이시스트로 곽효성을 데려다 라스트찬스를 만들었다. 그 친구들은 미8군과 이태원, 문산, 오산 등에서 공연을 했다. 나는 부대 내에 사병클럽, 장교클럽에서 신중현, 락 앤 키, 윤복희, 이금희, 박인수, 하청일과 서수남의 ‘그랜드 올 오프리’ 등 선배들과 무대에 섰다. 당시 패티김도 있었고. 다양하고 실력이 있었다. 미국인들이 굉장히 까다롭게 오디션을 봤기 때문에 수준이 높았어.

권석정 이중산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최우섭 이태원에서 만났지. 우리 브라더들 중 하나다. 우리는 이태원에서 1969년부터 함께 했다. 거기 세븐클럽, UN클럽, 007클럽 등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잘나갔지. 이중산은 계속 언더를 고집했다. 김광석(기타)이 이중산과 특히 친했지.

권석정 그때가 그룹사운드의 전성시대가 아닌가? 그 시절이 정말 대단했다고들 회상하시더라.

최우섭 우리 세대가 또 좋았던 것은 시민회관 불나기 전에 플레이보이 쟁탈전, 선데이서울 쟁탈전과 같은 대회가 많아서 밴드들이 나갈 곳이 많았다. 시민회관에서 김대환, 조용필, 최이철이 김트리오로 공연했는데 대단했어. 조용필과 최이철이 둘 다 베이스와 기타를 같이 메고 나와서 등 뒤로 돌려가면서 연주하고 그랬다. 데블스도 굉장했지. 소울에서는 박인수가 독보적이었다. 그 시절에 박인수 만한 보컬리스트가 없었다. 미8군에서 오티스 레딩의 <I’ve Been Loving You Too Long>과 같은 노래를 죽여주게 불렀다. 바보스의 연주도 굉장했어. 바보스의 이진이 국내에 포터블 건반을 최초로 들여왔는데 정말 대단한 건반 연주자였지. 나중에는 유명 DJ가 됐다. 그 시절에는 문화도 다양했어. 세시봉은 음악 감상하러 자주 놀러갔다. 김세환이 내 또래고, 창식이 형은 거지꼴로 돌아다니고 그랬지. 조영남은 노래하면서 전차운전을 했었다.

권석정 최우섭이 그런 선배 그룹사운드와 다른 스타일의 록을 하게 된 것은 미국에 다녀온 이후인가?

최우섭 그렇지는 않다. 미국에 가기 전부터 다른 음악을 하려 했다. 나는 더 후, 야드버즈, 크림, 제프 벡, 레드 제플린, 게스 후, MC 파이브 등의 음악을 했다.

권석정 라스트찬스의 김태화와도 함께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우섭 김태화는 나와는 친한 친구로 한국과 미국에서 계속 함께 활동했다. 나중에 김태화가 김정택 악단에 있던 김석규(기타), 노승준(건반), 곽효성, 한춘근(드럼)과 라스트찬스를 재결성했는데 그때 걔들 사운드가 정말 좋았지. 딥 퍼플의 <Child In Time>을 제대로 연주했으니까. 태화는 노래가 되니까 주위에 실력파들이 많았다. 당시 웬만큼 연주해서는 우리 곁에 올 수가 없었어. 김태화와 같이 했던 한상원(기타)은 ‘빠다 사운드’가 나게 기타를 연주해서 눈 여겨 봤었지. 지금은 유명해진 김광민(건반)도 같이 했고. 그때 우리 주위에서 최고의 연주자는 김양일(기타)이었다. 이중산은 게임이 안 됐어. 김양일은 이중산과도 같이 했는데 기타와 건반을 번갈아 연주했지. 걔는 서울대 치대를 나왔는데 연주도 천재적이었어. 피아노 선수인 광민이가 양일이한테 피아노를 배울 정도였으니까. 김양일은 천재라서 어떤 코드 진행 하나를 터득하면 기타와 건반으로 금방 연주해냈다. 그 누구도 김양일 앞에서는 잘난 체를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음악을 하지 않는데 걔가 제일 아까워.

권석정 미국에서 무당으로는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됐나?

최우섭 1975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차종면(드럼), 정진(기타), 김성관(베이스)과 밴드를 결성했고 미국에 뒤따라온 김태화가 보컬로 합류해서 라스트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장화영(건반)은 시애틀에서 만났고.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로스앤젤레스를 돌며 공연했다. 라이브클럽하고 UCLA, USC 대학에서도 공연했는데 그때가 정말 재밌었다. 관객들은 한국교포와 외국인이 반반이었지. 이후 버클리대학의 미국인 사학자가 우리에게 무당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샤머니즘을 전공한 사람이었는데 우리가 미친 듯이 공연하니까 무당에 대해서 설명을 하더니 그 이름을 추천해주더라.
    



  
권석정 한국에는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됐나?

최우섭 당시 TBC에 있던 선배 서병후한테 전화가 왔다. 레이프 가렛 한국 공연을 추진하려 하는데 알아봐 달라고 하더라. 나는 레이프 가렛이 누구인지 몰랐다. 알아보니 가수가 아니라 노래를 조금 하는 배우라고 하더라. 내가 미국에 좋은 뮤지션 많은데 왜 하필 레이프 가렛을 데려가려 하느냐고 말했더니 서병후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당시 무당의 일을 봐줬던 다니엘에게 부탁을 했다. 다니엘도 왜 한국에서 레이프 가렛 공연을 추진하는지 어리둥절해 하더라. 난 레이프 가렛 프로모터 자격으로 1980년 한국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레이프 가렛 오프닝밴드로 최고 인기 밴드였던 사랑과 평화를 추천했다. 그런데 레이프 가렛이 소울보다 록을 원하자 다니엘이 우리보고 공연을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미국에 있던 멤버들한테 급하게 전화를 했는데 한국이 시국이 어수선할 때라 들어오길 꺼렸다. 당시가 광주사태 일어난 후 계엄령 때라 길거리에 계엄군이 있었으니까. 결국 정진과 장화영 둘만 한국에 왔고 나머지 멤버는 급조해서 공연을 했다. 그런데 공연이 대박이 난 것이지. 숭의음악당에서 8일 동안 12회 공연이 열렸는데 보름 전에 완전 매진됐다.

권석정 공연장 분위기는 어땠나?

최우섭 사실 레이프 가렛의 공연이 수준 있는 무대는 아니었어. 당시 공연이 왜 잘 됐냐면 광주사태가 터진 직후였고 계엄령 때문에 사람들이 눌려 있었잖아. 오랫동안 위축돼 있었지. 사람들이 한창 불만을 삭히고 있을 때인데 해외공연이 일어나니까 난리가 난 거지. TBC는 떼돈을 벌었다. 3일쯤 지나니까 무당을 응원하는 피켓도 보였다. 소문이 난 것이지. 관객의 반응이 굉장히 열광적이라 나중에는 겁이 나더라. 사람들이 몰려서 숭의음악당 철문이 부서지고 애들이 드러누워 차가 나가지 못했다. 나중에 대사관 차를 빌려다가 레이프 가렛을 트렁크에 싫고 나올 정도였다. 당시 우리는 소공동 롯데 호텔에서 묵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레이프 가렛의 팬들이 바글바글하더라.

권석정 그래서 무당의 앨범까지 내게 된 것인가?

최우섭 조선일보 예능부 기자를 했던 석광인이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에 있었다. 석광인이 앨범 제의를 했는데 처음에 나는 준비가 안 되서 사양을 했다. 그런데 그가 기념앨범으로 생각하라며 사이드 A는 레이프 개럿, 사이드 B는 무당으로 내자고 하더라. 계속 거부를 하다가 앨범 2장을 내는 조건으로 전속 계약을 맺고 1,000만원을 받았다. 당시 조용필이 700만원을 받을 때니까 최고 대우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내 가사들이 심의에서 다 떨어진 거야. 계엄령 때라 심의가 더욱 심했다. 내가 미국에서 쓴 영어 가사를 개사했는데 “내 가슴의 상처뿐이었다”는 가사에서 ‘상처’도 안 된다고 빼라고 하더라. 내 노래 중 <멈추지 말아요>가 제일 먼저 떨어졌다. 사실 오아시스레코드에서는 그 노래를 밀려고 했는데 손진석 사장도 큰일이 난거야. 그래서 손 사장한테 내가 심의실에 직접 간다고 말하고 담당자를 만났다. 그런데 담당자가 날 보더니 대뜸 “아니 최우섭 씨 아무리 미국에서 왔다고 해도 그렇지 학생들 요새 데모하고 난리인데 ‘멈추지 말라’는 가사가 말이 됩니까” 이러는 거야. 내가 할 말이 없더라. 내가 하도 성질이 나서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오아시스레코드에서는 돈까지 줬는데 난리가 났지. 두 달 정도 미국에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한국에 와서 친구에게 아예 가사를 부탁했다. 그것이 나에게 첫 시련이었다. 한국 분위기를 너무 몰랐던 것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전속 계약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나중에 음악을 아예 관두게 된 것도 어쩌면 거기서 출발한 것이다.

권석정 1집에는 이중산이 참여했다.

최우섭 내가 손진석 사장한테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따지고 앨범을 안 낸다고 하니까 절대 안 된다고 하더라. 앨범은 내야 하는데 가사도 맘대로 할 수 없고 편곡도 손대기 싫어서 이중산에게 연주부터 편곡까지 전부 다 맡겼다. 무당 1집은 이중산의 앨범이라고 봐도 된다. 나는 노래만 했다. 당시 이중산이 왜 그렇게 편곡을 하고 연주를 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내가 이태원에 있을 때 제일 좋아하던 기타리스트였는데 1집을 망쳐놔서 나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권석정 2집 작업은 어땠나?

최우섭 1집 활동을 거의 못하고 다시 미국에 들어갔다. 손사장한테 전화가 왔는데 선진국에 사시는 분이 약속을 어기면 되느냐고 계속 독촉해서 한국에 돌아왔지. 그런데 무당이 아예 찍힌 것인지 2집 가사들도 심의에서 계속 떨어지더라. 그래도 계엄령이 걷혀서 조금 나아졌고 1집에서 떨어진 <멈추지 말아요>가 2집에 실렸다. 나중에는 그 노래가 우리 유일한 히트곡이 됐지. 1집과 2집이 수록곡이 많이 겹치는데 사실상 1.5집으로 보면 된다. 이건태(드럼)와 둘이 녹음을 다 했다. 내가 기타, 베이스, 보컬을 다 했지. 노래는 부족했어도 사운드는 꽤 록 사운드가 나왔다. 내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당시 한국에 그런 록은 없었다.

권석정 그 앨범은 한국에서 처음 헤비메탈로 시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최우섭 그건 모르겠다. 가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가사가 아니라 노래를 잘 부를 수가 없었다. 내 선에서는 굉장히 타협을 했는데 나중에는 그게 한이 맺혔다. 내가 그때 애초에 계약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레코드사에서는 최고 대우를 받긴 했지만 나에게는 치욕적이고 꺼림칙했다. 나는 1, 2집이 마음에 안 들어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음악이라는 것은 사운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사상이 있다. 아무리 연주가 좋아도 가사가 동요처럼 돼버리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치욕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이런 음악을 하려고 미국에서 그 고생을 했나 하는 좌절감도 있었다.

권석정 그래도 라이브에서는 보여줄 수 있지 않나?

최우섭 그렇다. 처음에 한국에서 공연할 때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레이프 가렛, 무당 특집이 있었다. 그때 왕영은이 엠시를 처음 봤을 때다. 리허설을 하는데 당시 AD가 내가 연주를 하는데 와서 끊는 거야. 3번을 끊더라. 당시 내가 미국에서 마샬앰프 JCM800하고 여러 이펙터 등을 가져와서 썼는데 걔들로서는 기존에 못 듣던 소리가 나니까 깜짝 놀란 거지. 2집을 내고서는 미국에서 함께 했던 김태화와 남이섬 페스티벌, 용평 팝 페스티벌에서 ‘무당과 김태화’란 이름으로 공연했다. 당시 용평 팝 페스티벌에서 록 밴드는 우리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전영록 등 다 가수였지. 이백천이 롯데호텔에서 록페스티벌을 열었는데 당시 우리가 메인으로 맨 마지막에 무대에 오르고 3인조였던 들국화, 동방의 빛 등이 함께 공연을 했다.

권석정 당시 무당과 함께 하드록을 시작한 밴드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최우섭 글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산울림이 꽤 헤비한 소리를 냈다. 김창완과 그 형제들은 연주는 아마추어인데 퍼즈를 가지고 그런 소리를 낸 것이 대단했다. 산울림과는 방송도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마그마와 작은거인이 있었다.

권석정 마그마, 작은거인과는 함께 공연을 했나?

최우섭 마그마와는 같이 하지 못했다. 내가 한국에 왔을 때 원래 조하문을 베이스로 함께 밴드를 하려고 했다. 조하문은 보컬까지 하니까. 김수철은 세컨드기타로 쓰려고 했다. 조하문과는 꼭 같이 해보고 싶었다. 김수철은 한참 후배이지만 걔가 나를 찾아와서 함께 공연도 하고 그랬다. 송골매, 이수만과 365일은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음악도 우리 같은 강한 록이 아니었으니까. 거기는 가요에 가까웠지.

권석정 연주 측면에서는 기존 한국 연주자들과 어떻게 달랐나?

최우섭 나는 미국에서 정통 록을 공부 한 것이니까 아무래도 앨범만 듣고 카피한 것과는 달랐지. 기타는 아예 미국에서 처음 배워서 연주하는 패턴이 달랐다. 똑같이 비틀즈, 딥 퍼플을 연주해도 내가 하면 뭔가 다르니까 다들 신기해했다. 똑같은 12소절 블루스를 연주해도 반음을 쓴다든지 운지도 다르고 기존 한국 연주자들이 사용하지 않는 스케일을 사용했다. 내가 특별히 기타를 잘 친 것이 아니라 그런 배움에서 온 차이가 있지 않았나 싶다.

권석정 무당은 방송에도 나갔다.

최우섭 ‘젊음의 행진’, ‘영일레븐’, ‘쇼2000’에 나가서 라이브를 했다. 다른 가수들은 MR에 노래할 때여서 방송사 엔지니어, 조명들이 우리를 싫어했다. 우리는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데 바닥에 선 그어놓고 움직이지 말라고 하더라. 무당 때문에 ENG 카메라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또 우리 멤버들이 장발에 수염이 있었는데 머리는 묶고 면도를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통닭이냐? 털을 깎게 하면서 공연 안 한다고 하고 그냥 가버리고 그랬다. 지금이니까 웃고 이야기하는데 당시에는 속이 많이 상했다. MBC에서는 국장이 우리 음악을 듣더니 너희들 미국에서 너무 일찍 왔다고 하더라. 그게 말이 되나? 우리는 안 떠도 된다고 하고 말았다. 외계인들하고 같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외계인이었던 건지. 그래서 1985년에 무당을 접어버렸다. 같이 활동하던 지해룡(보컬), 김일태(베이스), 한봉(드럼)을 모아놓고 이제 끝내자고 말했다. 동생들한테 미안했지만 더 이상 타협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끝냈다. 그런 상황에서 해봤자 더 나아질 것이 없어 보였다.

권석정 최헌, 김태화, 유현상처럼 가수로 전향하거나 대중의 구미에 맞는 음악을 했을 수도 있지 않나?

최우섭 돈은 많이 벌었겠지. 당시 이장희, 신상호(현 한국저작권협회 회장), 안태섭 등이 같이 하자고 했는데 다 거절했다. 난 프리덤이 중요했으니까. 무당은 우리랑 안 맞으면 아예 안 봤다. 지들이 밴드라고 해도 밤무대 악사들하고는 상종을 안 했다. 가수들과 인사도 안 했고. 분위기 살벌했다.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권석정 본인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었나?

최우섭 자부심이라기보다는 그들과 친해지거나 잘 알게 되면 타협을 하게 되잖아. 고생하지 말고 저녁일 해서 돈 벌자고 하면 솔깃할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무당은 철저했다. 내가 돈 때문에 음악 한다고 하면 아예 노동판을 나가서 다른 일 하겠다고 했다. 미국에서 활동할 때도 한국 클럽 가서 음악 해주고 돈 받을 수 있었는데 그런 것도 안 했다.

권석정 헤비메탈을 했던 후배들과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나?

최우섭 신대철, 김도균, 김태원이 다 직속후배지. 시나위, 부활, 백두산이 우리 이태원 연습실에서 다 연습을 했다. 연습실 겸 라이브클럽이었는데 나와 내 친구가 운영한 곳이었다. 그때 부활에는 김종서가 있었지. 그 외에 언더그라운드에 잘하는 애들 많았는데 빛을 못 본 친구들도 많았다. 후배들을 무당 공연 때 오프닝으로 세우곤 했다. 애들이 너무 고생할 때다. 내가 걔들한테 “나는 미국 갔다 왔는데도 이렇게 헤매는데 너희들은 왜 이런 음악 하려고 하느냐”고 말한 적도 있다. 미국 가면 대우받을 애들이 이곳에서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특히 김도균과 한춘근이 아까웠다. 백두산의 한춘근은 내가 미8군, 이태원에서 할 때부터 우리 드러머였는데 정말 최고였다. 그 시절에 한춘근이 드럼 솔로를 하면 미군들이 기립박수를 칠 정도였으니까. 걔는 혼자 드럼을 쳐도 음악이 된다. 드러머라기보다 소리꾼이었지. 내가 미국에 가서 그쪽 연주자들을 봤을 때 한춘근이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춘근은 당시 미국 연주자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권석정 ‘메탈 프로젝트’를 만든 후배들과도 알고 지냈나?

최우섭 ‘메탈 프로젝트’를 주도한 심상욱(뮤즈에로스)이 우리 무당 팬클럽 회장이었다. 심상욱은 원래 미술을 했는데 무당이 방송에서 사용한 세트를 그려주기도 했다. 당시 후배들이 다 기억은 나지 않는데 블랙신드롬 박영철도 무당 팬클럽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블랙홀 주상균은 나에게 직접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권석정 무당을 접은 후에는 무슨 일을 했나?

최우섭 미국에 가서 정식으로 뮤직프로덕션을 공부하고 프로모터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 상황을 보니 젊은 친구들이 문화적으로 너무 혜택을 입지 못하더라. 1969년에 클리프 리처드 이화여대 강당에 한 번 오고 차후 10년 동안 하나도 나아진 것 없이 1980년에 레이프 가렛 온 것이 내한공연 전부였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가 수준이 낮은 것을 활성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 계속 있다가 88올림픽 끝나고 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한국에 들어와 엔터테인먼트 사업 담당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때부터 한국에서 해외공연 사업을 시작했다. 돈이 목적이라기보다는 한국 젊은 애들이 너무 가여웠다. 나는 미국에서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애머슨 레이프 & 파머, 예스, 게스 후, 제퍼슨에어플레인, 그랜드훵크, 블랙사바스, 산타나, 올맨브라더스밴드, 제스로 툴 등의 공연을 직접 봤다. 미국에서는 금요일, 토요일만 되면 록 공연장에 10만 명이 몰리고 티켓을 못 구한 애들이 공연장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한국은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을 가 봐도 조용하더라. 나이트클럽만 잘 됐다. 도무지 문화란 것이 없더라.

권석정 90년대 이전에는 내한공연이란 것이 거의 전무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에 해외공연을 추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최우섭 당시는 모든 해외공연이 문화부 허가제였다. 처음에 먼저 스콜피온스를 데리고 오려 했는데 문화부가 사진에서 장발, 가죽바지만 보고 무조건 안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절충을 했고 처음 데려온 것이 존 덴버, 호세 펠리치아노였다. 그나마 음악 잘 하는 아티스트들은 선별해서 데려온 것이었다. 당시 서라벌레코드 산하에 ‘SRV’라는 인터내셔널 공연 기획사를 만들었다. 서라벌레코드 홍창규 사장이 나에게 투자한 것이다. 홍사장도 해외공연을 하고 싶어 했고 나와 의기투합한 것이다. 존 덴버, 호세 펠리치아노 공연이 대박이 났고 돈을 벌었는데 나는 록 공연이 하고 싶었다. 영미 쪽에 허가가 잘 안 나서 일본으로 눈을 돌려서 라우드니스 공연을 추진했다. 그런데 문화부에서 일본 가수는 더 안 된다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라우드니스 멤버들 이름을 죄다 영어로 바꿔서 아슬아슬하게 잘 넘어갔다. 문화부는 라우드니스가 일본 밴드인지도 몰랐다. 만약 걸렸으면 나는 쇠고랑 찼을지도 모르지. 88체육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아시아나를 오프닝으로 세웠다. 라우드니스가 일본에서 무대 장비까지 공수해와 무빙 스테이지를 선보였다. 무대가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방송국 PD들, 기자들이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는 그런 것이 전무했으니까. 나중에 또 일본에서 앤썸을 데려왔는데 그때는 시나위를 오프닝으로 세웠다.

권석정 또 어떤 공연들을 추진하셨나?

최우섭 듀란 듀란, 케니 지, 티파니도 데려왔다. 티파니는 안양공설운동장, 서울 하얏트 호텔, 부산 사직구장에서 공연을 했다. 하얏트가 스폰서를 했지. 당시 팬시회사들이 생겼는데 바른손, 아트박스 등에서 티켓판매를 하기도 했다. 얘들이 거기에 줄서서 표 사고 그랬지. 잘 되다가 된서리를 맞은 것이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나라가 발칵 뒤집어 졌지. 내가 미국 쪽 프로덕션하고 연결이 돼서 추진을 했는데 그 일 터지고 나서 홍사장이 구속되고 SRV는 문을 닫았다. 나는 다시 미국을 들어갔다.

권석정 한 명의 사망자를 낳은 뉴 키즈 온 더 블록 참사는 사회적 이슈로 당시 국내 여건이 대형 내한공연을 치르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이후 내한공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우섭 이후 내한공연이 잘 되면서 삼성전자, 제일기획, 금강기획, 대영기획 등 기업에서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내 공연파트가 생겼는데 내가 해외 인맥을 통해 내한공연 연결을 해줬다. 그러다가 내가 다시 본격적으로 내한공연을 추진한 것은 윤창중과 함께한 예스컴에서였다. 어느 날 윤창중과 저녁을 먹었는데 자기가 유현상의 친구고 나를 잘 안다고 하더라. 내한공연 사업의 경험을 쌓고 싶다고 해서 같이 일을 하게 됐다. 그 이후로 딥 퍼플, 야니, 본 조비, 데프 레퍼드, 산타나, 에릭 클랩튼 등의 공연을 연달아 유치했다. 딥 퍼플 공연 추진할 때 김형일(현 나인엔터테인먼트 대표)이 통역을 맡았는데 그 친구도 내 밑에서 일했다. 김형일은 참 개미처럼 열심히 일했다. 특히 본 조비는 국내에서 흥행 성공을 거둔 첫 록 공연으로 꼽힌다. 본 조비는 예스컴과 삼성디지털미디어가 파트너십으로 함께 추진했다. 스폰서가 없어서 내가 이재용(현 삼성전자 사장)에게 직접 부탁을 했는데 다음날 바로 거금을 내주더라. 그 공연은 약 한 달 전에 매진이 돼서 돈을 벌었고 삼성 쪽도 커미션을 꽤 이익을 봤다. 그러다가 내가 토털이벤트라는 개인회사를 설립했다.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AC/DC, 에어로스미스, U2를 데려오고 싶었다. 직원들도 미국 시민권자, 교포들로 꾸렸다. 그런데 IMF가 터지면서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됐다.

권석정 최근에는 내한공연이 무척 활성화됐다. 그리고 지산밸리록페스티벌, 인천펜타포트락페스티벌을 비롯한 음악축제도 늘어났다. 공연 기획은 이제 안 하시나?

최우섭 내년 말에 ‘아시안 잼’을 기획하고 있다. 이것은 페스티벌과 다르다. 해외 뮤지션들을 데려다가 아시아를 돌면서 공연을 하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시작해 중국 상해, 싱가포르, 대만, 말레이시아 이런 식으로 아시아에서 말이다. 국내 수요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공연을 보러 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공연을 열면 국내에 수요가 적어서 추진을 못하고 있는 롤링스톤즈, AC/DC, 에어로스미스와 같은 대형 밴드들도 데려올 수 있다. 현재 해외 기획사와 접촉 중이다.

권석정 무당이 25년 만에 재결성했다.

최우섭 2007년에 광명음악밸리축제에서 실제 무당과 무대에 올라 굿판을 벌이고 함께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무당의 노래 중에 <매직 댄스>라는 곡이 있는데 그게 원래 15분짜리다. 공연을 급하게 준비하느라고 음악적인 것을 완전히 복원하지는 못했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무당의 퍼포먼스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시각적으로 굉장히 화려한 것이 많다. 원래 음악은 개인적인 취미로 간직하려 했는데 그 공연을 마치고 자신감이 생겼다. 작년 말부터 구상에 들어갔고 내 80년대 오리지널들을 다시 발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현재 기존 곡 16개를 복원해서 편곡 중이고 내년 초부터 싱글로 발표할 예정이다. 이제 곧 녹음 들어간다. 멤버들과 연습 중이다.

권석정 지금 무당 멤버들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최우섭 김현모는 사일런트아이의 베이시스트로 한참 후배인데 나와는 원래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정식 멤버라기보다는 현재 세션으로 도와주고 있다. 원래 오리지널 멤버인 김일태가 합류하려고 했는데 악기를 오래 쉬어서 현재 트레이닝 중에 있다. 한봉은 음악을 아예 그만 뒀다.

권석정 결국 음악으로 돌아왔다.


최우섭 이제 나이를 먹었지만 다시 음악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프로모터로서도 바쁘게 일했는데 내가 직접 음악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대선배로서 음악계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60살 넘은 내가 음악 죽이게 하면 자극이 되리라 본다.




출처 : http://ksoundlab.com/xe/sound_music100/1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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