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960년대 사건사고
Photographer Unidentified
2·28 대구 학생의거 (二二八大邱學生義擧) 당시 경북고생들과 대구고생들이 경찰에 검거되어 끌려가고 있는 모습
Photographer Unidentified
Photographer Unidentified
2·28직후 여학생들이 시위하고 있는 모습
Photographer Unidentified
2.28 민주운동 직후 학생들이 대구 중앙로에서 시위하는 모습
Photographer Unidentified
Photographer Unidentified
연행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교실에서 농성중인 경북사대부고 학생들
Photographer Unidentified
1960. 3. 15 마산여고생 시위대에 소방차가 물을 쏘고 있다
1965년 7월 20일자 이승만 전대통령의 사망 조선일보
사진 구와바라 시세이
Photographer Unidentified
김종필과 오히라의 비밀 메모, Korea, 1962
Photographer Unidentified
한일협정 체결 2년 7개월 이전인 1962년 11월 21일 진행된, 대한민국 중앙 정보 부장 김종필(金鍾泌, 1926~)과 일본 외무 대신 오히라 마사요미(大平 正芳, 1910~1980) 간의 비밀 회담 내용을 담은 메모.
메모의 주요 내용은 한국의 대일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일본은 한국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지불하고, 경제 협력 명목으로 공공 차관 2억 달러와 상업 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일 청구권 문제가 경제 협력 방식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했다. 이 메모의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민 감정이 격화되었으며 김종필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인민혁명당사건 (人民革命黨事件, 인혁당 사건, 1964), 1974
Photographer Unidentified
1975년 인혁당 사건을 해외언론에 알려 한국에서 강제추방된 제임스 시노트 신부. "시신만은..." 박정희 지시로 시신을 불태웠다.
유신정권 당시 정치권력에 종속된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불법이 낳은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례. 시기에 따라 1차 인혁당 사건(1964년)과 2차 인혁당 사건(1974년)으로 구분되는데, 주로 논란이 되는 것은 8명이 사형당한 2차 인혁당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은 1974년 4월 군사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당시 중앙정보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법원은 이 중 8명에게는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여덟명.
서도원 (나이 53세)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김용원 (나이 41세) 경기여고 교사
이수병 (나이 40세) 일어학원 강사
우홍선 (나이 46세) 한국곤든스템프사 상무
송상진 (나이 48세) 양봉업
여정남 (나이 32세) 전 경북대 학생회장
5.16 쿠데타 (The May 16 Coup), Korea, 1961년 5월 6일
Photographer Unidentified
사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인사들, 앞줄 좌로 부터 5번째 박정희 의장
한일협정반대운동 (Movement against Korea-Japan Treaty, 韓日協定反對運動), Korea, 1964
Photographer Unidentified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거센 반대 운동에 부딪혔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전개된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한 야당, 지식인, 학생,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
유럽 간첩단 사건 (Europe 間諜團 事件), Korea, 1969
Photographer Unidentified
1967년 케임브리지 대학 교정에서. 왼쪽부터 김신근 씨. 박노수씨 부부. 임민식 씨, 김판수 씨.
1969년 발생한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영국 캠브리지대 박노수 교수와 민주공화당 김규남 국회의원 등을 연행, 불법 구금하며 강압적인 수사를 벌였으며 검찰은 유럽에서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이들을 기소하였다.
박노수 교수는 북한 노동당원으로서 간첩 활동을 한 혐의를, 김규남 의원은 대학 동창인 박 교수와 이적 활동을 한 혐의를 받았다. 이후 1970년 대법원에서 박 교수와 김 의원의 사형이 확정되었고, 2년 후인 72년에 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검찰은 중앙정보부가 가혹 행위를 가하며 수사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소를 하였고, 법원은 자백 외에는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형식적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중앙정보부의 불법 연행과 강압 수사, 협박, 고문 등으로 박 교수 등이 허위 자백하였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고, 같은 해 유족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이에 사형 선고 후 43년 만인 2015년 12월 29일 박 교수 등 세 명은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확정 받고 누명을 벗었다.
대구 (Daegu, 大邱), Korea, 1970
Photographer Unidentified
경부고속도로 최종 개통 경축식이 열린 대구시민운동장입구에서 각 동별로 선발된 시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보기위해 한꺼번에 행사장으로 들어가다 밀려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이 사고 현장에서 실신한 노인들을 응급처치하고 있다.
고 이준열사 유해 환국식, Korea, 1963
Photographer Unidentified
숭인동 판자촌 화재로 인해 화재민들이 청계천을 건너 살림을 나르는 모습
전주시 (Jeonju-si, 全州市), Korea, 1966
Photographer Unidentified
1966년 8월 전국적으로 뇌염 경보령이 내려진 가운데 전북에서는 뇌염환자가 522명이 나왔다. 이들 중 어린이가 98명이나 사망해 전국 최고 기록을 세웠다.
당황한 전북 보건당국은 보사부로부터 지원받은 방역 진료반과 의약품을 전달하고, 의료진을 부안, 김제, 정읍, 고창 등에 우선 파견했다. 하지만 사망자가 줄지 않아 당국은 바짝 긴장했다. 특히 병원이 없는 부안의 경우 의료진들이 교회 마루에서 어린이들을 진료해 가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했다. (정지영, 디지털 자료화사업 기획위원)
Photographer Unidentified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 장례식
Photographer Unidentified
독일파견 간호사 제1진 128명 출발
1966년 1월 30일 실업문제 해소와 해외 인력수출의 일환으로 간호사 128명이 독일로 출발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230여 명의 간호사가 파견되었다.
Photographer Unidentified
한일협정반대운동 (Movement against Korea-Japan Treaty, 韓日協定反對運動), Korea, 1964
사진 구와바라 시세이
Photographer Unidentified
중앙정보부가 1967년 7월 대학교수와 유학생등 194명이 동백림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이다 적발됐다고 발표한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재판정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동베를린사건, 동백림간첩단사건 1967년 7월 8일~1969년 3월 31일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천상병 시인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1월 2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상주장학관을 급파하여 유학생 및 해외인사들의 반정부활동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공소장의 내용과는 달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건 당사자들은 관련자들을 처음 만났으며, 평양을 방문한 적도 없고, 북한으로부터 간첩활동을 하라는 지령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이 1967년 6.8 부정총선 규탄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임을 발표하였다.
Photographer Unidentified
서산개척단원, 1964년 11월 24일, 서산
서산 자활정착사업장. 이 곳은 부랑아나 불우여성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새 삶을 개척해 나갈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얀옷 입은 여성들이 신부, 검은 옷 입은 남성들이 신랑이다. 그 옆에 군복 같은 것을 입고 있는 사내들은 다른 개척단원들이다.
Photographer Unidentified
1969년 3월 18일 새벽 4시 10분 경 서울 동대문구 시외전화국 뒤 숭인동 판자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판자촌 2백여채를 불태웠다. 화재로 2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고지는 대부분 날품팔이로 살아가고 있는 빈민촌으로 판잣집이 밀집되어 소방도로가 없어 화재진압이 더뎠다.
Photographer Unidentified
1960년 서울 원각사 화재 진화
Seoul, Korea, 1970
Photographer Unidentified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1970년 4월 8일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경, 마포구 창천동에 위치한 와우 아파트 15동이 붕괴하여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고.
광화문 복원 기공식, Seoul, Korea, 1968
Photographer Unidentified
Photographer Unidentified
Photographer Unidentified
Photographer Unidentified
Photographer Unidentified
Photographer Unidentified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인해 사퇴성명을 하고 있는 이병철
Photographer Unidentified
1976년 12월 7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3층에 새로 문을 연 그룹 종합전산실을 이병철 당시 회장과 이건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가 둘러보고 있다.
Photographer Unidentified
박정희 무기징역, Korea, 1963
Photographer Unidentified
좌익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 1963년 10월13일 동아일보 호회
1963년 10월13일 윤보선이, 박정희가 과거에 남로당에 가입해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폭로한것이 호외에 실렸다. 남로당 군사총책 여순반란 양민학살 두목 간첩죄로 방첩특무대장 김창룡에 잡혀 사형구형에 무기징역.
Photographer Unidentified
Photographer Unidentified
천주교 신자가 80만 명에 불과하던 1969년 3월 천주교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추기경이 되었다.
Photographer Unidentified
1969년 10월 27~28일 전주고등학교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학교 후관 2·3학년 교실 19곳과 물리화학 실험실 교실 21곳이 모두 탔고, 전주 북중학교 본관 교실 23곳이 전소 돼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 망연자실했었다.
정인숙 살해사건 (鄭仁淑 殺害事件), Korea, 1970년 3월 17일
Photographer Unidentified
박정희 정권 최대 섹스 스캔들 및 권총살인 사건
1970년 3월17일 늦은 밤 서울 마포 절두산 아래 '강변 3로'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17일 하오 10시45분쯤 서울 마포구 합정동 139 강변 3로에서 서울자2~262호 검은색 승용차(코로나)를 운전하던 정종욱씨(31)와 정씨의 누이동생 인숙양(26)이 4·5구경 권총에 맞아 왼쪽 귀밑에 관통상을 입은 인숙양이 숨졌고 정씨는 오른쪽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미모의 20대 여성이 오빠와 함께 심야에 자가용을 타고 가다 권총으로 피살당한 사건은 충격적이었고, 대중의 관심을 끌 요소를 지녔다. 경찰은 원한이나 치정 등으로 인한 살인 사건으로 추정해 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피살당한 정인숙(본명: 정금지)씨의 신상이 알려지면서, 단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 숱한 고급남성 접촉으로 구구한 설의 아버지를 둔 3살짜리 아들까지 두게 된 것'(3월20일자 7면) 등 정씨의 수상한 신상이 하나둘 드러났다. 특히 정·관계 고위 인사 26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정씨의 수첩이 언론 취재를 통해 확인되면서 사건은 타락한 권력과 성이 얽힌 희대의 스캔들로 확대됐다.
수첩에는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등 절대권력의 실세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최고 권력이 엮인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의 끝은 뻔했다. 경찰은 불분명한 자백만을 근거로 오빠 정씨에 의한 강도살인 사건으로 발표하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지었다. 경향신문 3월23일자 사회면 기사는 '배후 수사 않겠다는 경찰 수사 발표의 의문점'을 열거하면서 '아기 아빠에 대한 수사를 않은 점'을 첫 번째로 지목했다.
최고 권력층과의 염문, 숨겨진 아들의 아버지를 두고 갖가지 설이 돌았으나 박정희 정권 최대 섹스스캔들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은 채 미궁에 빠졌다.
출처 : 페이스북 - Designersparty ( https://www.facebook.com/designersparty )
http://www.typeholic.com/bbs/board.php?bo_table=fun&wr_id=151
댓글
댓글 쓰기